태양은 외로워 (L'Eclisse, The Eclipse, 1962) ★ 놀꺼리 ★



사랑이 찾아온다한들 누군가의 잃어버린 몫 위에 서 있는 현재에서는 모든 것이 불안할 뿐이다.

'자본주의의 불온한 미래와 부르조아의 어쩌구 저쩌구... ' 라는 조금 딱딱한 표현을 물리치면, 결국 영화에서 말하는 이야기는 저런 것일게다.
늘 그렇듯이 대가들의 영화란 그 이야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을 더욱 난처하게 만드는 순간이 있다. 나에게는 그옛날 공포를 불러일으킬정도로 따분하다고 일컬어지는 첫 시퀀스보다는 증권거래소 시퀀스가 더욱 당혹스러운 순간이었다.
고요한 영화의 심상이 일시에 사라질정도로 거대한 소음이 가득차있고,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돈을 위해 소리지르고 뛰어다닌다. 시퀀스는 고통스러울정도로 길게 그리고 시끄럽게 이어진다. 이 풍경들은 빅토리아가 걸어다니는 근사한 중산층의 동네와 함께 영화가 끝나고도 내내 마음에 남는다. 어쩌면 그토록 잘나가는 남자를 걷어차고 빅토리아가 그의 집을 나왔을 때에는 어떤 모종의 결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와 그를 둘러싼 환경보다는 그에게 질려버린 자신의 감정을 선택했다. 그녀는 근사한 환경이 제공하는 모종의 것들이 신기루같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어떻게 해야할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문제는 그녀가 서 있는, 누리고 있는 것들 모두가 너무나도 공기와 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들 대다수가 그렇듯 그것들은 존재하는 기저를 깊숙히 알기에는 우리 모두 너무 나이브하다. 그녀 역시 스스로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렇기에 피에로를 사랑하게 되면서도 불안한 것이다. 그 불안이 인식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그 고요하고도 평온한, 그리고 정돈된 풍경들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불안감이다. 그리고 그런 불안감은 이내 어떤 표적을 향해 달려가거나 은폐된다. 신문속의 핵전쟁 위험처럼. 그 신문기사가 제공하는 불안은 내가 느끼는 불안의 실체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걸 쉽게 믿어버린다. 불안의 실체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다는 위안만 남은채 다시 시간이 흐른다. 만든지 50년이 다되가는 영화는 소름끼치도록 현재의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ps.1
요시다 슈이치의 '동경만경'은 환경을 선택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존중한 빅토리아의 감정에 대해 다뤘다. 다소 감상적이지만 바로 그 감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다뤄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동경만경'은 하고 있다. 그래봤자 주인공 여성의 남자 간보기가 아니냐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 간보기가 고민을 드러내는 행위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듯 싶다. 결국 자신의 감정을 납득하고 이해하기까지. 많은 부분을 '동경만경'은 '일식'이라는 영화를 통해 드러낸다. '동경만경'은 '일식'에 대한 유려한 감상평으로 다시 읽어도 무방할 듯 싶다. 물론 그렇다고 드라마 '동경만경'을 보는 실수를 범하지 마시길...

ps. 2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비정전은 많은 부분 이 영화에서 그 화면의 근간을 빚진게 아닌가 싶다.



 


체벌이 권리일까? ★ 잡담 ★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근대 이전의 폭력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노예, 짐승, 여자, 아이는 맞아야 정신차린다.' 그 외에 남성끼리는 결투라는 이름의 사적인 폭력이 존재했었다.
그런 것들이 근대가 되자 하나 둘씩 금지되어가기 시작한다.
결투, 노예는 아예 그 제도 자체가 사라지고,
짐승은 이제 사유재산에서 동물학대라는 개념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제 하나 남은 것이 아이이다.
만약 아이를 때리고자 한다면, 그 폭력의 범주가 어디까지 선을 그어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다만 아쉽게도, 폭력은 범주가 없다. 폭력 자체가 나쁜 것이기 때문에 좋은 폭력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애들을 체벌없이 가르칠 수 없다면 그 교육자는 사라져야 한다. 체벌로 손쉽게 탈출하고 국민의 혈세를 받아갈 정도로 간편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면 그 건 교육자가 아니다. 월급도둑이 따로 있는가?
체벌이라는 비정상적인 방식을 없애자고 하는 것이 마치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 스스로가 얼마나 안일하고도 나이브하게 살아왔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현실을 보자고 하지만, 그런 것을 고민해달라고 사회적으로 돈을 주고 부탁하며, 교사라는 이름의 명예를 주는 것이다.
일단 당장의 편한 방식을 취득하고 싶다고 고민을 멈추는 순간, 그 교사는 떡검이랑 과연 무슨 차이겠는가?
물론 일방적인 교사위주의 책임론으로 몰고가고 싶지는 않다. 교사를 대입 영업사원으로 만드는 현재의 입시제도는 아이도 교사도 폭력이라는 획일적인 방식에 의해 길들어지게 할 수 밖에 없을테니까.
하지만, 시스템의 탓만 할 것인가? 개인의 힘은 미약하지만 개인이 바꿀 수 있는 여지도 있다. 힘든 길이라고? 그러나 미안하게도 선생이라는 직업은 바로 그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레몬일 때, (レモンのころ, 2007)




이 영화는 애초에 일본에서 잘 만드는 청춘영화에 다중의 주인공을 세우고, 그 위에 여러 청춘영화에 봤음직한 장면들의 그럴듯함을 외피로 씌우려고 했었던 것 같다.
다중의 주인공을 세우는 영화는 단한명 혹은 커플로 묶여지는 주인공의 이야기보다 짜임새가 구성지고 복잡할 수 밖에 없다. 개개별의 사연이 다른 이야기를 단일 영화의 통시적인 시간과 구성속에서 같은 상승과 해결을 만들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의미의 상업영화가 특정한 시간대에 전개/위기를 넘어서 절정으로 치달을 때, 다중의 주인공들은 그 동일한 시간대에 영화내내 보여주었던 사건 혹은 감정의 해결에 관한 절정을 맞이해야하는 것일거다. 그게 아니라면, (생각나지는 않지만) 그와는 다른 방식의 효과적이고도 대안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이 영화에는 두가지의 이야기가 있다. 첫째는 우등생 카요와 야구부 사사키와의 사랑. 그리고 그 둘사이에 카요를 오래부터 짝사랑해오던 사사키의 친구 니시의 이야기다.
둘째는 음악작가를 꿈꾸며, 아이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놀기만 하는 시라타가 유일하게 음악에 대한 마음이 맞으며 짝사랑으로 발전하게 되는 밴드부의 츠지모토와의 이야기.

첫번째 이야기의 갈등은 두가지다. 카요을 짝사랑하는 니시와 그마음을 알지만 받아줄수 없는 카요
그리고 우등생 카요와 공부를 못하는 사사키가 험난한 수험기간을 지나서 결국 각자의 성적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되는 되는것.

중학생때부터 카요를 짝사랑해오던 니시는 카요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지만, 카요는 사사키를 좋아한다며 거절한다.
초반에 바로 거절했기 때문에 앞으로 등장하지 않을 이야기라면, 굳이 좋아하는 남자애의 친구가 자기를 짝사랑한다는 설정은 시간낭비일뿐이다. 이른바 삼각관계라는 틀 속에서 청춘의 갈등을 오밀조밀하게 담은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끝이 난다. 깔아논 설정에 비해 너무나 소박하고 의미없는 결말이다. 그러다보니 니시는 중학교때의 회상씬까지 첨부할정도로 중요한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이후 1시간동안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카요와 사사키의 갈등에 영향을 끼칠것도 아니라면, 굳이 왜 좋아하는 남자아이의 친구가 자기를 짝사랑한다는 설정은 집어 넣은걸까? 그래놓고 영화내내 까먹어버리는 캐릭터라면 (포스터에는 당당하게 드러나 있는 정도라면) 왜 이렇게 중요한 척 시선을 잡아두었을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찍어놓고 분량상 삭제를 한 것 같다는 섵부른 추측을 할 수 밖에 없다.
시나리오상에서 이런식이었다면, 영화화되기에는 이미 함량미달이었을테니.
이영화는 일본 특유의 조용하고도 차분한, 연출로 이루어져있다. 대사보다는 시선, 사건보다는 그 정취를 담아내는 데 공을 들이고, 그를 통해서 영화전반의 정서에 힘을 싵는 이런 연출방식은 영화내부의 이야기가 허술하면 시간낭비로밖에 보이지 않는법이다.
여유롭게 찍어놓은 이미지 샷 대신에 이야기의 찰기를 집어넣기 위해 씬들을 추가하는 것이 오히려 이영화에는 효과적이었으리라. 그러다보니 그런 느슨한 연출로 영화의 분량을 다 잡아먹고 결정적인 순간의 해결은 대사 몇마디다. 물론 울림이 있는 대사 한마디가 관객의 정서를 뒤흔들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 대사를 말하기까지의 모든 상황설정이 속된 말로 아다리가 맞았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명백히 '린다 린다 린다'를 참조한 학원제의 콘서트 신은 예상대로라면 이영화의 절정으로 기능했었야만 했다. 그럴려면, 시라타가 작사한 노래를 츠지모토가 불렀을 때, 그 가사의 힘은 실연한 시라타에게, 그리고 성적으로 갈등하는 카요와 사사키에게 무언가 정서적인 해결을 만들어주었어 했다. 하지만 결국 그노래와 가사는 그다지 다가오지도 않고, 그러다보니 무언가 미심쩍게 해결된 정서를 위해 콘서트가 끝나고 시라타가 츠지모토에게 달려가 고맙다라고 울먹이며 소리치는 것을 집어넣고,
이 씬이 끝나고 별도로 사사키와 카요의 이야기를 해결하기위해 다시 매달린다.
뭔가 절정은 본것같은데 미적지근하게 해결하고, 그걸로도 모잘라 뒤에 두 주인공팀중에 한 팀은 빼먹고 나머지 한팀의 이야기를 무려 20분이나 소비해서 해결한다.

이쯤되면, 잘되지 못한 영화의 모든 것을 갖고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찰기있게 스며들지 못한 캐릭터 그냥 잊어버리고 뒤에 급히 해결하기.
절정신이 크게 와닿지 않으므로 뒤에 별도의 신들을 더 추가해서 사족 만들기.
주인공이 여러명인데, 조화롭게 이어지지 못하므로 하나씩 차례대로 해결하기.
그러다보면, 결국은 깔끔하게 끝맺지 못하고 성근 결말과 감정으로 그냥 엔딩을 맞이하기.
거기에, 잘했으면 이런 소리를 당연히 안들었겠지만, 앞서의 이런 단점들 때문에
여러 영화에서 봤음직한 장면들의 꼴라주가 굉장히 꼴사납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엄청난 대재난까지.
정성들여 만들어낸 일본 영화특유의 차분하고 아름다운 화면은 그렇게 그냥 소비되어버리고 영화는 엉성하기 짝이없는 만듬새로 속칭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그저 그런 작품으로 굴러 떨어진다.

오랜만에 본 정말 못만든 영화.
인생의 2시간을 허비했다는 아쉬움이 이영화에 대한 총평이라면 너무 잔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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