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이 찾아온다한들 누군가의 잃어버린 몫 위에 서 있는 현재에서는 모든 것이 불안할 뿐이다.
'자본주의의 불온한 미래와 부르조아의 어쩌구 저쩌구... ' 라는 조금 딱딱한 표현을 물리치면, 결국 영화에서 말하는 이야기는 저런 것일게다.
늘 그렇듯이 대가들의 영화란 그 이야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을 더욱 난처하게 만드는 순간이 있다. 나에게는 그옛날 공포를 불러일으킬정도로 따분하다고 일컬어지는 첫 시퀀스보다는 증권거래소 시퀀스가 더욱 당혹스러운 순간이었다.
고요한 영화의 심상이 일시에 사라질정도로 거대한 소음이 가득차있고,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돈을 위해 소리지르고 뛰어다닌다. 시퀀스는 고통스러울정도로 길게 그리고 시끄럽게 이어진다. 이 풍경들은 빅토리아가 걸어다니는 근사한 중산층의 동네와 함께 영화가 끝나고도 내내 마음에 남는다. 어쩌면 그토록 잘나가는 남자를 걷어차고 빅토리아가 그의 집을 나왔을 때에는 어떤 모종의 결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와 그를 둘러싼 환경보다는 그에게 질려버린 자신의 감정을 선택했다. 그녀는 근사한 환경이 제공하는 모종의 것들이 신기루같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어떻게 해야할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문제는 그녀가 서 있는, 누리고 있는 것들 모두가 너무나도 공기와 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들 대다수가 그렇듯 그것들은 존재하는 기저를 깊숙히 알기에는 우리 모두 너무 나이브하다. 그녀 역시 스스로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렇기에 피에로를 사랑하게 되면서도 불안한 것이다. 그 불안이 인식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그 고요하고도 평온한, 그리고 정돈된 풍경들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불안감이다. 그리고 그런 불안감은 이내 어떤 표적을 향해 달려가거나 은폐된다. 신문속의 핵전쟁 위험처럼. 그 신문기사가 제공하는 불안은 내가 느끼는 불안의 실체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걸 쉽게 믿어버린다. 불안의 실체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다는 위안만 남은채 다시 시간이 흐른다. 만든지 50년이 다되가는 영화는 소름끼치도록 현재의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ps.1
요시다 슈이치의 '동경만경'은 환경을 선택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존중한 빅토리아의 감정에 대해 다뤘다. 다소 감상적이지만 바로 그 감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다뤄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동경만경'은 하고 있다. 그래봤자 주인공 여성의 남자 간보기가 아니냐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 간보기가 고민을 드러내는 행위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듯 싶다. 결국 자신의 감정을 납득하고 이해하기까지. 많은 부분을 '동경만경'은 '일식'이라는 영화를 통해 드러낸다. '동경만경'은 '일식'에 대한 유려한 감상평으로 다시 읽어도 무방할 듯 싶다. 물론 그렇다고 드라마 '동경만경'을 보는 실수를 범하지 마시길...
ps. 2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비정전은 많은 부분 이 영화에서 그 화면의 근간을 빚진게 아닌가 싶다.


